“한미 통상관계 ‘리셋’… 국내 기업에 조세 혜택·재정 쏟아부어야”[월요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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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주 기자
김헌주 기자
수정 2025-08-10 17:39
입력 2025-08-10 17:39

최석영 전 주제네바 대사

미국이 지난 30년간 유지돼 온 세계무역기구(WTO) 다자무역 체제 종식을 선언했다. 관세와 제조업 보호에 초점을 맞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정책이 기존의 세계무역 질서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무역 합의 체결 장소인 스코틀랜드 턴베리 지명을 따 새 무역 질서를 ‘턴베리 체제’라고 이름 붙인 미국은 “우리는 이제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 대표)고 했다. 강대국이 정한 ‘룰’이 곧 새 질서가 되는 뉴노멀의 시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한국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30년 넘게 직업 외교관으로서 양자·다자 협상에 참여했으며 지금은 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팀 고문으로 활동하는 최석영(70) 전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는 10일 “WTO 체제는 더이상 작동을 안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가까운 미래에 이 체제가 복원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과거 확립된 질서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질서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과도기로, 힘에 의한 질서가 지배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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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영 전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영세율(관세 0%)을 유지하는데 미국 관세율만 갑자기 15%가 된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내용은 물론 정신에 어긋난다”면서도 “한미 FTA의 관세 부분이 망가졌다 해도 비관세, 규범, 서비스, 투자, 제도적 협력 등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최 전 대사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이지훈 기자
최석영 전 주제네바 국제기구 대표부 대사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영세율(관세 0%)을 유지하는데 미국 관세율만 갑자기 15%가 된 것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내용은 물론 정신에 어긋난다”면서도 “한미 FTA의 관세 부분이 망가졌다 해도 비관세, 규범, 서비스, 투자, 제도적 협력 등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최 전 대사가 지난 6일 서울 중구 법무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이지훈 기자


美, WTO체제 종식 선언
강대국 중심 통상질서로 재편 중
근시일 내 WTO 복원은 어려울 듯
한미 양국 관계도 재설정되는 시기
-트럼프의 관세 압박에 ‘동맹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는 시각이 있다.

“지금은 글로벌 통상 질서가 다자 질서에서 근본적으로 강대국 중심의 일방주의 질서로 재편되는 시기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의 동맹 관계, 통상 관계도 ‘리셋’(재설정)되는 시기로 보는 게 맞다. 더군다나 한미 간 통상 협상은 조용하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양국 정부와 민간 기업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최근에는 통상 문제가 안보와 직결되면서 협상 자체가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예전에 비해 협상에 따른 충격도 훨씬 큰 상황이다.”

-곧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어떤 대비를 해야 하나.

“이번 정상회담은 한미동맹 관계의 향후 방향을 특징 짓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실제 무역 협상 테이블에서 같이 논의를 안 했을 뿐이지, 같은 시간 다른 테이블에서는 논의를 해 왔다. 주한미군 역할 확대, 방위비 및 국방비 증액 문제도 핵심 사안으로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이 부분 관련 미국의 청구서가 나오거나 양국 간 일정한 양해 사항을 발표하지 않을까 싶다. 관세 협상에 대해선 합의 자체를 평가하고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대한 방향을 언급할 것으로 본다.”

-관세 협상은 선방했다는 평가가 많다.

“25% 관세를 맞는 최악의 국면을 피했다는 점, 관세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제거됐다는 점에선 긍정적인 면이 있다. 다만 대미 투자 펀드가 어떤 방식으로 조성되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누가 소유하며 누가 이익을 갖고 가는지에 대한 양국의 이해가 다르다. 농산물 수입에 대해서도 양측의 입장이 다르다. 세부적인 내용의 모호성은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데, 최악의 국면을 피하기 위해 정치적 타결을 먼저 한다는 점에서 ‘건설적 모호성’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숙제를 뒤로 미룬 거다.”

-협상 내용을 명확히 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는 없나.

“이를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협상을 또 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지금은 일종의 정치적 합의를 하는 단계이므로 모호한 대로 놔 두는 게 양쪽에 다 좋다. 섣불리 문서화 작업을 해 트럼프가 생각하는 선물이 구체화되면 우리가 바가지 쓰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므로 후속 협상이 더 힘들고 중요하다.”

-자동차 협상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본, EU 등 경쟁국에 비해 미국 시장에서 2.5% 관세 격차 우위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게 소멸돼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지만 협상을 잘못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강자가 약자에게 ‘그냥 돈 줄래, 맞고 돈 줄래’ 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협상이기에 우리 협상단이 ‘잘했다’, ‘못했다’ 이렇게 평가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면에서 보면 미국의 힘을 이용해 미국 주도의 통상 질서를 재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정치 게임을 잘하고 있는 거다.”

-최혜국 대우를 적용받는다고 하지만 반도체 관세 우려가 크다.

“미국 정부가 약속했다고 하는 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불리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반도체에 대해 100% 관세를 부과하되 미국에 생산설비를 가지고 있거나 설비투자 계획을 시행하는 경우 예외를 검토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투자했거나 공장을 건설 중이므로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 있으나, 워낙 변동성이 많은 여건을 감안해 예의 주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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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영 전 주제네바 대사
최석영 전 주제네바 대사


‘한미정상회담’ 대비 어떻게
동맹관계 방향 특징 짓는 계기 될 것
주한미군 역할·방위비 등 핵심 사안
관세 협상 구체화 방향 등 언급 전망
-관세 수입이 막대해 미국이 관세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다고 한다.

“트럼프 1기 때 중국에 초강경책을 쓰면서 한국·일본·EU에 대해서도 철강 관세를 부과했는데, 조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없어지기는커녕 그대로 승계했다. 통상 문제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좀 과한 측면이 있지만 상당 부분 의회가 정한 입법에 근거해 무역정책을 취하고 있고, 의회의 태도가 행정부 태도와 거의 비슷해 앞으로 행정부가 바뀐다 해서 이 정책이 갑자기 바뀔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관세 인상이 경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는데도 계속될까.

“미국 입장에서는 부채를 줄이고 제조업 생산 기반을 늘릴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자동으로 들어오는 관세 수입을 스스로 막을 이유가 전혀 없다. 물가 인상이 있을 수 있지만 위험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관세를 신축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미국이 미래의 어떤 불확실성 때문에 ‘관세를 미리 낮춰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은 안 할 거라고 본다.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보는 이유다.”

-시급하게 교역 다변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관세 압박은 결국 강대국의 강압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강압에 취약한 부분이 뭔지를 살펴야 한다. 교역 관계가 특정 국가, 특정 품목에 너무 치우쳐 있으면 취약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다변화할 새로운 시장이 없는데 무조건 미국 시장 의존도부터 줄이는 게 가능한 것인지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다만 특정 시장에 편중돼 있는 위험을 분산시키려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같은 지역 협력 체제 등 우방국과의 협력 체제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CPTPP 참여 논의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진척이 없었다.

“문재인 정부 때 CPTPP 가입을 추진했지만 정부가 협상하기 전 국회에 보고하는 절차 단계에서 막혔다. 이 협정에 가입하려면 농산물 쪽을 좀더 열어야 한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국가들이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 정부 아닌가. 여당도 압도적 의석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는 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단순한 무역 자유화가 아닌 공급망 안정성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핵심 광물, 핵심 부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경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통상 뉴노멀 시대 생존 전략
美에 수출 때 환적·원산지 위반 조심
세계 각국 보조금 대놓고 주는 시대
기업 지원 정책·입법 흐름 반영해야
-뉴노멀 시대에 기업들은 난리가 났다.

“이제 수출할 때마다 미국 관세를 계속 맞아야 하는 구조다. 미국이 우회 수출을 방지하기 위해 원산지 검증을 굉장히 까다롭게 한다. 즉 환적, 원산지 위반을 조심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원산지 위반 품목에 대해서는 관세를 40% 추가로 더 부과하고 벌금도 매기겠다고 했다. 미국이 이렇게 하면 다른 나라도 대응 조치를 마련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각 나라들이 취하는 무역 투자 정책에 대한 모니터링을 훨씬 더 강화해야 한다.”

-기업 지원 방안도 강구돼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보조금을 대놓고 주는 시대다. 국제 규범 위반을 따지는 것은 전혀 실익이 없다. 세계 각국이 자국 우선주의 기조하에 막대한 재정과 조세 혜택을 자국 기업에 쏟아붓고, 경제안보 확보를 위한 배타적인 법과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안보 정책과 입법에도 이같은 흐름을 반영해야 할 엄중한 시기다.”

김헌주 기자
2025-08-1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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